그냥 하지 말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
더욱이 우리가 이렇게 변화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동화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는, 앞서 살펴본 대로 사람과의 관계를 제어하고 싶은 욕망의 결과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비대면non contact이 아니라 선택적 대면selective contact입니다. 로보틱스, 자동화는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그러기 싫으면 안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나아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어떻게 적응할지도 고민해야겠죠.
성취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훈장
누군가에게는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장 미국 주식을 살지 말지 누가 찍어주면 좋겠다는 사람에게 몇 년 동안 책 읽으라 하면 좋아할까요? 그러니 급한 대로 ‘1000권 읽고 깨달은 것들’ 같은 다이제스트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취란 다이제스트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1000권을 읽는 와중에 그 노력을 통해 각성하는 거지, 1000권에 담긴 정보가 저절로 각성을 주지는 않습니다. 성취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훈장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은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증표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의 긱이코노미가 예전에는 없었나요? 있었죠. 직장인이 파트타이머부터 시작해서 파워블로거, 유튜버 등 다양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더이상 하나에 올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인은 보상체계가 충분하고, 그 시스템이 항구적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직도 기관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환경변화도 빨라서 올인이 힘들어지고요. 그래서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포트폴리오 전략이 생존에도 적용됩니다. 다양한 정체성이 폄하되지 않고 권장됨에 따라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은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증표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태어난 다음에 나온 것
특히 밀레니얼뿐 아니라 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릴 정도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익숙합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도 이전 세대에 비해 장벽이 낮고요. 테크놀로지에 대한 정의 중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당신이 태어난 다음에 나온 것Technology is anything invented after you were born, everything else is just stuff”이라는 말입니다. 컴퓨터과학자 앨런 케이Alan Kay의 말인데, 한마디로 내가 새로 배워야 하는 신기한 게 테크놀로지라는 거예요. 저에게 스마트폰은 테크놀로지입니다.
상사가 관리자가 아니라 동료로 인식된다면, 이제는 상사도 일해야 하는 거죠
이런 변화가 직업관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업을 생각할 때에도 직업과 직장과 커리어를 각각 다른 형태로 생각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직업은 사회적 역할과 하고 싶은 업을 절충한 것이고, 직장은 인간관계나 근무환경이 중요한 반면, 커리어는 개인적 목표와 훗날 쓸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것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 셋을 같은 것으로 봤는데 분화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직장 내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10년 전에는 선배가 모범을 보이고 후배에게 열정을 기대하는 모종의 위계가 있고, 그에 따라 ‘존경’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요구되는 것은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영원한 상사였을 사람이 지금은 한시적 동료인 것입니다. 동료가 내게 무례하게 구는 걸 참을 수 없고, 심지어 그 관계마저 한시적이니 훗날을 기약하는 미덕을 굳이 발휘하지 않습니다.
상사가 아니라 동료가 되면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십니까? 상대가 일하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데이터에서 상사와 관련해 ‘무능’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유죠. 예전에는 상사가 일 안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았어요. 저분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상사와 직원 모두 능력을 따집니다. 상사가 관리자가 아니라 동료로 인식된다면, 이제는 상사도 일해야 하는 거죠. 물론 상사에게 능력을 요구하는 신입도 그래야 하고요.
이렇게 하여 모두 다 일하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정성 이슈가 나오고, 집단평가가 아니라 개인평가로 선회합니다. 이제 회사에서 가장 배척되는 사람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흔히 2030은 업무와 보상체계, 그에 따른 처우 등이 행복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속내를 보면 사실은 인정받고 싶고,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얻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구에 기인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에 맞게 우리 조직의 제도와 문화도 바뀌어야겠죠. 동료로서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 그의 커리어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기 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간의 인간은 대체됩니다
그 결과 온갖 종류의 꿀팁이 등장했습니다. 결혼준비 Q&A, 각종 생정(생활정보) 등. 커뮤니티에 떠돌던 다양한 노하우가 지금은 유튜브에서 발현되고 있습니다. ‘국룰(국민룰)’이라는 이름으로요. 예전의 생정처럼 이제는 사소한 것까지 대신 정해주는 ‘국룰’이 있습니다.
온갖 국룰이 생겨난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내 평판과 효율을 극대화하고 싶어서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러나 이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평범한 게 판교 신혼부부라면 출발부터 불행을 잉태한 거죠. 기준이 높은데 그게 기준이라뇨. 심지어 그걸 모아놨어요. 국어, 영어, 수학을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무엇보다 평균, 중간을 추구한다는 국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글프게도 중간의 인간은 대체됩니다. AI는 중간을 학습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지금 중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로 많은 변화가 중간에 있는 인간들을 없애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개인의 영역으로 점차 확장되는 게 보여요. 플랫폼은 비용을 낮추고 효율은 높이는 규모의 경제로 움직이기 때문에 소상공인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 앱이 커지면 지역 여행사가 망하고, 부동산 앱이 잘되면 중개업자가 어려워져요. 그 밖의 각종 동네상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이 모든 영역으로 연결되고 확장됩니다.
프로세스가 자동화되면 이제는 플랫폼 내부 인력도 줄이게 될 것입니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사용상의 편리함이 우리 삶에 장점을 주지만, 사람과의 접점이 사라지는 만큼 사람들이 힘을 잃습니다. 자동화 서비스의 장점이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역할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인간은 소외되겠죠. 이런 식이면 생산에 과연 인간이 필요할까요?
프로바이더가 되거나 크리에이터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자아의 각성: 삶의 주도권을 가지려면
자동화의 격랑 속에서 생산의 주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영화 〈아이, 로봇〉의 똑같이 생긴 기계들이 아니라 만화 〈스머프〉처럼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각자 다른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 말입니다. 전체의 일부인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죠.
아이덴티티는 항구적인 인간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바깥 활동이 제약되고 혼자 있어서일까요, 최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정체성 내지는 자존, 자신감을 ‘관계’에서 풀었습니다. 어느 회사의 김 대리라는 식이죠. 그런데 이제는 관계로 풀 수 없으니 반대로 나 자신에게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외부적인 형태의 누구 아들딸, 김 대리 같은 게 아니라 ‘너 누구니?’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는 거죠.
이처럼 방법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플랫폼을 만들거나 장인이 되는 것. 즉 프로바이더가 되거나 크리에이터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1등이 되어야 하고요. 가운데는 없어요. 결국 이 이야기의 무섭고도 슬픈 결말은, 우리가 완전체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베블런은 1899년에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는 용어를 제안했습니다. 자본소득이 높아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지금부터 유한계급이라 부르자는 거였죠. 이들은 노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의 여유를 더 많이 표현할 것인지가 무척 중요한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유한함을 표현하기 위해 쓸모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지금은 ‘포스트 베블런’을 말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벨레짜Silvia Bellezza 교수는 과거에는 여가와 사치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일하는 게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말합니다. 자동화, 무인화 때문에 일반적인 업무는 인간이 낄 틈이 없으니 바쁘게 일하는 삶이 오히려 나의 훌륭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아티스트, 장인, 나아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을 테고, 나머지 대중은 기회가 없을 수 있으니까요.
훌륭한 사람을 뽑으면 관리할 필요가 없다
어정쩡한 중간이 기계에 대체되는 세상에서는 조직 또한 완성된 사람들이 모이는 형태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 재목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이미 검증되고 완성된 사람들, 프로페셔널이 모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어벤져스〉처럼 말이죠.
실제로 많은 회사들이 공채가 아니라 직무로 뽑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뽑으면 관리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죠. 훌륭한 이들은 스스로 관리하지, 남의 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뭘 해야 하는지 아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알아내기 때문에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전만 있으면 됩니다. 리더십은 그것을 찾는 작업이고요.
이미 잘하는 사람들을 뽑는다면 매니지먼트도 감시가 아니라 구성원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되겠죠. 나는 일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관리자가 보고서 줄맞춤과 오타를 잡았다면 이제는 각자 일을 하고 합치는 형태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모두에게 책임과 권한이 양여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의사결정을 부탁하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알아서 전문성을 기반으로 완성시켜 오고, 그것을 조합하는 일을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의 관리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고 성장의 기록을 채록하는 것이 곧 나의 프로파일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왓챠 메이팅도 가능할 것 같아요. 좋아하는 장르가 똑같으니 당신과 당신은 딱 맞네, 이럴 수도 있다는 거죠. 내가 봤던 모든 흔적이 남고, 그 콘텐츠를 기반으로 추천리스트가 뜨기 때문에 오히려 메이팅의 확률은 결혼정보회사보다 왓챠나 넷플릭스가 더 높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습니다. 내 의지와 그 표상을 기록하는 것이죠. 따라서 나를 드러내는 기록은 주체가 나여야 합니다. ‘김 과장, 보고서 다 썼나?’ 해서 써내는 건 내 기록이 아니에요. 시켜서 하는 거니까요. 내 의미를 담으려면 내가 주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발점을 찍고, 조금씩 확장해가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련하고, 결과에 대해 오롯이 책임지고, 내 이름이 쓰이게 될 때 나를 표현하는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내 속에서 우러나서 썼다면 회사 보고서도 내 기록이 될 수 있겠죠.
이제는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고 성장의 기록을 채록하는 것이 곧 나의 프로파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직접 하셔야 하고요. 둘째,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 성장 과정이 나의 자산으로 환금될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문화적 자본이니까요. 그리고 그게 나의 업이 될 테니까요.
오리지널리티, 저작권을 가져야지 기술이나 기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창시자가 돼야 해요.
예전에는 ‘거기 맛있던데?’ 정도였다면 이제는 누가 만들었고 제조원은 어디며 판매자와 제조자가 같은지 다 따집니다. 배달 앱에서 맛집 메뉴를 시킬 때에도 업장의 로드뷰가 있는지를 봐요. 업장 사진이 없다? 그러면 상호만 10개씩 걸어놓고 매장은 없는 곳 아니냐며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만든 이의 의도를 알고 싶은 거예요. 의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시류에 편승한 무임승차자인지 알고 싶은 거예요. 동시에 처음부터 해온 그 사람의 굳은 의지와 역사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진짜를 판별하고, 근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이야기는 ‘진정성’에 이르렀습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하도 많이 쓰이다 보니 진정성이야말로 진정성 없는 미사여구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많이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진정성 정도가 아직 구성원들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기 때문인 듯합니다.
‘가짜’가 아니라는 의미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진짜’로서의 진정성을 생각해볼 차례겠죠.
앞서 ‘인간인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 답이 기술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오리지널리티, 저작권을 가져야지 기술이나 기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창시자가 돼야 해요. 오리지널리티 없이 기술을 습득한다면 기술이 자동화되기 시작했을 때 나의 가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창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숙련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을 먼저 해야겠죠. 과거처럼 도제로 들어가서 기술을 익히는 게 먼저가 아니에요. 무엇을 할 것이며 누구에게 배울 것인지,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진정성
진정성authenticity의 어원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성 있는 행동이란 내가 의도하고, 내가 행한 거예요.
이를 업의 관점에서 풀어보면 주체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가지 덕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다는 건 첫째는 의지의 문제이고요, 둘째로는 전문성의 문제입니다. 즉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춘 순간, 우리는 신뢰를 얻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장인 또는 예술가라 부릅니다. 일의 주체가 나인 것입니다.
투명성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건 절차적 적합성이므로 성실함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진정성은 주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지, 그것을 위해 정해진 의무를 넘어 헌신하는지까지 올라갑니다. 그의 인생의 지향점이 정말 그 가치를 선호하는지까지 가는 것입니다. 즉 투명성이 해야 하는 의무라면, 진정성은 그것을 넘어서는 헌신의 문제입니다.
결국 진정성의 문제라는 거죠. 내가 했느냐 낙하산이 얘기했느냐, 속내를 얘기했느냐 그런 척했느냐, 그 차이입니다. 이제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첫째,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직접 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그에 따른 전문성과 주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생방송의 인생을 살아갈 때 녹화방송의 안전함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축적한 전문성을 근간으로 주체성 있게 살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으니 좁힐 필요는 있겠죠.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나의 본진을 설정하고, 먼저 시작함으로써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영역의 시조가 된다면 근본의 주체가 될 수 있으므로 더이상 경쟁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성은 상대적이므로 몰입의 총량이 큰 사람이 이긴다
그러니 후광효과를 일으키는 신도의 모임을 구성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판매는 그다음이에요. 즉 층위가 있다는 거죠. 범주가 확장된다는 얘기입니다.
마블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되는 것처럼요. 이것들이 다시 원용되어 팬아트가 나오면 그야말로 세계관에다 신도까지 확보한 엄청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 김용이 그랬고 톨킨이 그랬다면 이제는 웹소설이 세계관을 팔고 있습니다. 각자가 가상의 세계에 대한 신도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원류란 없다는 게 앤드루 포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문화는 계속 복제되기 때문에 원류란 게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장면이 중국에 있나요? 있어요. 자지앙미엔이라 하는데, 맛은 한국과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자장면을 중국 음식으로 인식하죠. 중국사람들은 그걸 한국식이라고 하고요. 미국에서는 한국 식당에서 자장면을 팝니다. 이처럼 각자의 생각을 더해 끝도 없이 만드는 거지, 무언가를 원리주의적으로 보존해가는 게 아닙니다. 공감 포인트를 이해할 수 있으면 원류가 아니어도 활용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앤드루 포터는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말합니다. 즉 진정성은 상대적이므로 몰입의 총량이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에요. 결국 어떤 가치를 끝까지 추구하는, 하드코어한 쪽이 이기는 겁니다.
발견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해야 하고, 오래 해야 합니다
알리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
이와 관련해 제가 만든 키워드는 ‘발견되다’입니다. 내가 어떤 걸 전략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라 그저 내 삶에서 건실하게 구현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대세가 되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요즘 빅데이터, 메타버스가 유행이야. 누가 하고 있었지?’라고 물을 때 진즉부터 하고 있던 이가 발견되는 거예요. 무언가 뜬 다음에 하면 편승한 사람이라 깊이가 깊지 않기 쉽습니다. 축적의 시간이 부족하기 마련이거든요. 말하자면 팔로워죠.
그렇게 발견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해야 하고, 오래 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오래 살잖아요. 기존 방식의 조직과 시스템이 날 보호해줄 수 없기 때문에라도 더 긴 기간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일관성consistency이 중요합니다. 일관되려면 지향점이 한결같아야 하므로 그걸 설정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해요. 먼저 원을 그리고, 그 원에 내 활동들을 정합시키는 작업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양이, 그다음에 곤충, 파충류처럼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는데 우린 뭘 하고 있었을까요. 어릴 때는 개미 같은 곤충을 보고 만지는 게 놀이였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도 모르게 남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죠. 내가 언제 이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엔가 이렇게 루틴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곤충을 좋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뜰 것 같은 아이템을 하나 골라잡으라는 게 아니에요. 각자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보기에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고,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할 것 같아요. 어릴 적 좋아했던 것이 있는데 그걸 잊고 어느 순간엔가 사회적 압력과 남들의 기대에 치여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내 꿈을 찾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곤충을 좋아한다고 반드시 곤충학자가 될 필요도 없죠. 일단은 그냥 좋아하면 됩니다. 그게 업이 될 수도 있고, 산업으로 커질 수도 있고, 학문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냥 개인의 애호가 될 수도 있겠죠. 그건 개인의 선택입니다.
아무나 만나면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고민의 총량을 파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에 다 의미와 상징을 새겨넣고, 그런 다음 상대에게 넌지시 얘기해주는 거예요.
요즘은 실력 있는 작은 가게들이 많습니다. 간판도 요란하지 않지만 업에 대한 소신과 고민으로 상징성을 얻은 곳들입니다. 그 상징성 하나하나에 주인장의 정신이 깃들어 있겠죠. 그의 인생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고민의 총량이란 내가 했던 시도의 총합이므로, 내 전문성 및 숙고의 결과를 파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의 축적도 있지만 이해와 지식의 총합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의 해박함을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결여돼 있으면 노동을 팔아야 하는데, 노동은 AI가 가져갈 테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원류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드는 작업이지, 예전처럼 여기 우리 제품이 있다고 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오히려 아무나 만나면 안 됩니다. 설명하지 않고 툭 던졌을 때 이해한다면 내게 훌륭한 분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고객이 아니에요. 우리가 집어넣은 상징을 이해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만 다가가면 됩니다. 그들이 전파자가 될 테니까요. 헤리티지를 해석해주는 사람이 붙고, 이들이 문명을 전파하듯 사방에 퍼뜨리는 것이 곧 바이럴 구조 아닌가요?
대행을 주면 안 돼요
현재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데도 불안함에 뭔가 계속 배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거나, 퇴근 후에 책 쓰기 수업을 들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시도가 현실적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내 몸에 체화될 만큼 실질적인 결과물을 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데이클래스를 매일 배우고 있는 셈이죠.
그게 아니라 일상에서 내가 하는 일 자체를 혁신하면 어떨까요? 예컨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하는 프로세스를 내재화하거나 업무 하나하나를 개선한다면, 그 혁신과정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 되어 내 경쟁력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중요한 것은, 일을 해야죠. 더 중요한 것은, 대행을 주면 안 돼요.
200여 년 전 산업혁명 당시에도 공장의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공짜로 제공했다
이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200여 년 전 산업혁명 당시에도 공장의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커피를 공짜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거 마시고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도 여러분 마시라고 커피를 비치해두지 않았나요? 그것은 말하자면 직원들을 카페인으로 착취하는 겁니다. 말로는 복지라고 하지만, 직원들을 위한다면 건강에 좋은 우유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하여튼 아침에 마시는 커피에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닝커피는 설탕이 듬뿍 든 믹스커피입니다.
깊게 하는 사람이 살아남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오래하게 되고, 자연스레 역사가 생깁니다.
새로운 시대의 전문가는 학력이나 이력, 경력을 내세우는 전문가가 아니며, 단순히 덕후도 아닙니다. 근본이 있고 애호와 전문성을 갖추며, 그런 자신을 브랜딩할 수 있는 개인들이 살아남을 겁니다. 깊게 하는 사람이 살아남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오래하게 되고, 자연스레 역사가 생깁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을 믿고 지지해줄 팬덤이 생기죠. 그게 곧 브랜딩 아닌가요?